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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칭유래

동명칭 유래

세마동(洗馬洞)

세마동은 1789년(正祖 13년)까지는 시봉면(市峰面), 산성면(山城面), 삼미면(三美面)일부가 속했으며, 1793년(正鳥 17년)에 발간된『수 원부읍지』의 지도를 살펴보면 산성(山城)이 나오고 문시와 삼미가 보인다. 또한 1789년(正祖 13년)의 총인구수를 보면 시봉면은 곡죽(谷竹)리와 세교(細橋)리가 나오는데 2백15가구에 인구는 남자가 2백41명, 여자가 4백12명, 합계 6백53명이며, 산성면에는 지곶리와 양산리가 있는데 2백49가구에 남자가 3백63명, 여자가 4백24명, 합계 7백87명인데 당시 수원부 전체의 면이 50개면에 가구수 1만 5천 1백 21가구에 남자가 2만 8천 2백 40명, 여자가 2만 9천 4백 20명이다. 현재의 세마동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총가구 1,001가구에 남자가 1,503명 여자가 1,380명, 합계2,883명이다 그런데 시봉면의 인구가 남녀의 분포가 거의 두배에 이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1831년(純祖 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문시면(시봉면+삼미면)과 산성면으로 문시면에는 모두 8동으로 명학(鳴鶴)동, 죽담점(竹潭店), 묵암(墨巖)동, 신촌(新村), 옹동(瓮洞), 평촌(坪村), 세교(細橋)리, 관음(觀音)동 등이며, 산성면에는 5동으로 서(西)리, 남(南)리, 지곶(紙串)리, 신촌리, 양산리 등이었다. 1899년(光武 3년)에도 문시면(文市面)과 산성면으로 그대로이며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 1914년 4월 1일 이후 부터는 수원군 성호면(城湖面)으로 통합되고 1941년에 다시 오산면으로, 1960년 1월1일 부터는 화성군 오산읍으로, 1989년 1월1일부터 오산시 세마동이 되었다.

외삼미동(外三美洞)

외삼미동은 바깥삼미라고 하여 삼미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과 죽미령의 바깥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의 뜻도 있으며, 우리말로는 ‘밧삼미’로 ‘밧’은 ‘밖’의 옛말이며, 문시(文市), 뱅골, 명학을 묶어 외삼미동이 되었다.

세교동(細橋洞)

세교동은 작은 다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거의 없으며, 그래서 잔다리, 세교리 등으로 불리어졌다. 세교동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면 오래된 마을임에 틀림이 없다. 1789 년(正祖 13년)에 시봉면의 방리로 세교리가 등장한다. 지금은 세교 1동 2동 3동으로 구분되나, 예전에는 큰말, 건너말(越村), 오리골로 세 마을이 합쳐져 세교동이 되었으며 1989년 오산시가 승격되면서 세마동의 동사무소가 위치하게 되어 세마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동이다.

양산동(陽山洞)

양산동도 역시 오래된 마을이다. 1789년(正祖 13년)에 산성면 양산리로 불렸으며, 1914년 4월 1일 오산이 수원군 성호면으로 될 때까지 산성면으로 있었고, 다시 1941년 10월 1일 오산면 양산리였으며 1960년 1월 1일 오산읍 양산리, 1989년 오산시 승격과 함께 세마동에 편입된 마을이다. 원래는 양산봉리(洋傘峰里)라고 하여 마을 뒷산에 있는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양산(洋傘)을 펴서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데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나, 양산에 가려진 북쪽의 마을이라 음지(陰地)로서 양지(陽地)를 그리며 양산(陽山)리로 불려졌고, 양산골, 양산곡 등으로 불렸다. 현재는 한신대학교가 들어서 마을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독산과 양산봉의 밑이라 경관이 좋고 공기가 맑은 최적의 전원마을이다.

지곶동(紙串洞)

지곶동 역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지곶동의 지명유래도 매우 복잡하다. 원래 종이(한지)를 만들던 마을이라는 한자 풀이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일설에는 예전에 이마을에 감나무가 많아서 가을이면 곶감을 많이 만들었다는 뜻에서 꿰다의 뜻이 곶(串)이라는 의미에서 지곶동이란 설도 있으며, 마을 뒤에 있는 독성산에 예전에 닥나무가 많아서 이것을 이용한 한지를 생산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종이와 연관이 있는 마을이며 178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 지곶리(紙串里)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이고지, 종이고지, 조꼬지, 지곶동 등으로 불린 것이 사실이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지곶리’는 종이를 뜨는 조지소(造紙所)가 이곳에 위치했다. 지곶동은 1789년(정조 1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 지곶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을 뒤의 독성산과 더불어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서랑동(西廊洞)

서랑동은 세마동에서는 가장 뒤늦게 생겨난 마을로 생각된다. 문헌에 서랑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99년(光武 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의 방리 중에 서리(西里)가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서랑리로 보인다. 그리고 1914년 4월 1일에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개편 때에 처음으로 서랑리(西廊洞)마을명이 나온다. 이런 사실로 보아 서랑동이 생겨난 것은 약 2백여년 전으로 보인다. 처음 마을이 생겼을 때는 ‘사랑(沙浪)이’라고 불렸으나, 그 후에 사랭이, 사랑리로 변하여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랑리(西廊洞)로 불려오다 서랑동으로 되었다. 서랑동은 오산에서 최적의 전원 마을이며 교통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나 예전 그대로 모습으로 인심과 풍습이 남아 있어 고향 같은 마을이다.

관리담당자 : 세마동 문의 : 031-8036-6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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